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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

문학 2011. 5. 31. 00:42

지도에는 신기한 매력이 있다. 어려서부터 지구본을 이리 저리 살피며 도식화된 미지의 세계에 호기심을 품어왔다. 사회과 부도가 없었더라면 학창시절 수업시간 내내 책상을 마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금 위치한 곳을 기준으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지도상의 낯선 지명에 알 수 없는 끌림이 있었다.

언젠가부터 지도를 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있는 위치를 확인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인지, 아니면 단순히 기호를 인식하고 해석하며 길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감이 싫었던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평면의 지도를 보며 갈망하던 낯선 곳을 3차원의 현실로 만나게 되자 지도를 버렸다. 무작정 걸으며 내 나름대로의 지도를 머릿속에 입력했다.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려 하고 있다. 병실에서 함께 싸워 온 어머니는 기나긴 레이스에서 리타이어 했고, 피로감인지 권태기인지 알 수 없는 묵직한 기운이 주인공을 억누른다. 주인공은 슬픔과의 맞불작전보다는 회피를 택했다. 어머니의 거친 손 가죽 같은 나뭇조각을 어루만지면서 매개체가 있어야만 기억하는 자신의 한심함을 탓한다. 소설 내내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새로이 마주하고 곱씹는다. 지금까지 숨 막히게 달려오느라 잊고 있었던 것들, 그리고 앞으로의 자신에 대한 어슴푸레 한 기대-기대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소설 전반적인 분위기는 막연한 기대감과 설렘이 아주 은밀한 것처럼, 혹은 대놓고 흐르고 있는데 주인공의 모습은 너무나 피곤해 보이기에-가 마치 자신의 것이 아닌 양 펼쳐지고 있다. 서랍 속 낡은 인생의 흔적들을 되새김질 하면서 그것이 마치 내 자신의 역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누구나가 다 그럴 것이다.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그 느낌. 과거의 나와 마주하면 지금의 나는 고개를 숙이고 만다. 현재의 자신이 과거의 자신에게 당당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유치원 때는 일주일 간격으로 바뀌던 장래희망이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에 와서는 그 무엇 하나 남아있지 않을 때, 과거의 내가 기억 속에서 서글프게 웃는다. 주인공은 알고 있다.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고, 그를 중심으로 지도를 그려야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타인에게 훌륭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훌륭하다면 그것은 훌륭한 것임을 어렴풋이 끄집어내는 주인공에겐 아마 새로운 인생이 펼쳐질 것이다. 새롭다고 해야 할까, 그 삶의 연장선에서의 크고 작은 새로움 중 전환점 이라고 불리는 커다란 포인트일 것이다.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반드시 섬광처럼 지나가는 것이 아닌, 수많은 순간의 퇴적 속에 묻혀있는 인생의 결정적 순간.

소설은 끊임없이 인생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지도를 통해 표현한다. 현실과 이상(지도) 과의 괴리(오차), ‘훌륭함’ 이라는 단어가 없는 에스키모의 지도, 자신을 중심으로 펼쳐 나아가는 길들. 나는 아직 내 지도를 그리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 학기에 다다라 이제 뭐로 먹고 살아야 하나, 막막하기만 하다. 희뿌연 안개가 이중 삼중으로 피어올라 길을 잃을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인다. 누구나가 다 자신을 중심으로 길을 찾아 지도를 그려야 된다는 것은 알고 있다. 남들에게 훌륭하지 않아도 자신에게 훌륭한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는 것을 우리는 글로 배웠지만 현실이라는 잔인하고도 치사한 테두리 안에서 그 배움을 배반하길 끊임없이 강요당한다. 자, 이제 어떻게 그려야 할까. 한번 그리고 마는 것은 아니지만 펜을 들었으니 시작은 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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