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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운영 - 입김

문학 2011. 6. 16. 18:59

낫은 바위를 깨트리지 못했다. 그저 약간의 흠집만 남겼다. 낫은 남자를 건물에서 나갈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영원히 건물과 함께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낫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무언가를 파괴하는 일이었다. 바위에 흠집을 내고, 남자의 나체가 승강기의 어둠속으로 떨어지도록 도왔다. 낫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실패한 인생이다. 경제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실패한 사람으로 간주되는, 모든 것이 경제적 논리와 잣대로 인해 평가되고 규정되는 우리사회에서 남자는 완전히 실패한 인생이다.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효율과 수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너무나 흔한 인간상인 사장에게 그는 그저 늙고 무능력하며 비효율적인 노동력일 뿐이다. 사장에게 비효율적인 노동력인 그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장은 오갈 데 없는 남자를 내치고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발길질을 하며 분풀이 상대로 전락시킨다. 사장에게 남자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인 배려 따위는 조금도 없다. 남자도 역시 경제적 헤게모니를 쥔 사장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한다. 사장 앞에서 초라해지는 남자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사장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제구실을 못하는 노동력은 사회의 일원으로도, 인간으로도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는 경제적 강자 앞에서 자신을 숙이도록 길들여져 왔다. 경제적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사장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존재이다. 그는 철저하게 자본에 종속된 인물로, 타자를 효율과 성과 등의 도식화된 기준으로밖에는 판단하지 못한다. 우리는 절대적 가치가아닌 상대적 가치에 의해 자신의 위치와 상품성이 결정되고 구분지어지며 소비된다. 돈의 논리는 인간을 지배하고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구분 짓는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인간은 이미 이 사회에서 인간이길 포기했다는 낙인이 찍혀버린다.

그런 그를 받아준 것은 흉측한 건물이다. 건물 역시 처음의 기대와는 달리 층수는 반 토막이 나고 제구실을 못한다. 조감도와는 판이한 건물을 보며 남자는 일종의 동질감 비슷한 위안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새 사장이 나타나고 건물이 경제적 구실을 할 움직임이 보이자 불안을 느낀다. 그에게 건물은 곧 자신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동지라 느꼈던 건물의 숨소리를 들으며 건물과 영원히 함께 할 것을 결심한 남자는 자신의 몸이 건물과 하나 되길 원하며 몸을 내던진다. 그는 결국 그의 죽음을 통해 건물 역시 자신과 같은, 팔리지 않는 처지로 남길 바랐던 것은 아닐까.

죽음은 근대 이후 개인에게 최후의 저항수단으로 사용되어왔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몰렸을 때 마지막 투쟁방법으로 죽음을 택했다. 개인의 죽음이 사회적 담론으로 확대되고 기폭제가 되어 역사를 바꿔 온 경험도 있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피를 헛되이 하지 않는다. 는 말이 있다. 국가는 노동환경의 개선을 외치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인 노동자가 숨을 거둔 이후 눈부신 발전을 이뤄왔다. 부가 쌓이고 노동환경 또한 몇 십 년 전에 비하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개선되었지만 노동자들의 지위는 여전히 낮고 누군가는 항상 이 체제하에 경쟁력을 상실한 채 소외되고 만다. 경제적 능력과 소유한 부의 차이에 의해 약자로 전락한 그들은 생존을 위해 죽음을 선택해야하는 어떤 역설적인 상황에 맞닥트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그들의 죽음에 동요하지 않는다. 극한의 몰리기까지의 과정도, 그 결과도 그저 수많은 정보의 파편정도로 흘려버리고 만다. 우리는 반 강제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수 없도록 길들여졌다. 누군가의 피가 점점 무의미해져간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 그자체로 존중되는 것이 아닌, 경제적 가치에 의해 도구화되고 소비되는 현대사회의 경향을 나타낸다. 경제의 수레바퀴를 돌리기 위한 부품으로 전락한 개개인의 존엄성을 우리는 어디에서 다시 찾아 올 수 있을까.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의 상실이 만연한 이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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