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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헤세 - 싯다르타

문학 2011. 5. 31. 00:44

헤르만 헤세의 완숙기 대표작 싯다르타. 언제부터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내 시야의 한켠에는 항상 이 책이 있었다. 늘 공부를 해야 하는 부모님의 직업 탓에 집에는 가구를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책이 가득했고, 아마도 작은 몸집을 가진 이 책은 지금은 고인이 되신 리영희 교수의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옆에 다소곳이 꽂혀 있었을 게다. (아, 이 글을 처음 쓸 때는 아직 고인이 아니셨는데 이제는 고인이 되셨다. 이렇게 쓰는 것도 참 애석하고 애석하다.)

처음 이 책을 꺼내 든 건 2007년의 봄으로 기억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바쁘지 않은 시간에는 이런 저런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체게바라 평전을 다 읽은 후 집어든 것이 이 책이었다. 책장에 꽂혀있던 이 책은 1983년에 발행된 것이었다. 이미 누렇게 변색되고 이상하게 마음이 안정되는 묵은내를 풍기는 책에는 아주 옛날인 것 같은, 아버지의 필체가 남겨져있었다.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아버지는 이 책을 교재로 했었나보다. 특유의 작고 아기자기한 연필글씨가 낡은 책과 잘 어울렸다. 그것만으로도 나에겐 이 책이 특별한 책이 될 여지가 충분히 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있다. 올해 4월초 3년 정도 만나다 헤어진 남자친구와는 음악과 책, 영화를 공유하며 친해지고 교제하게 되었고, 그 계기가 된 책 중 하나가 이 싯다르타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저쪽에서 추천해주면 나는 책을 추천해주는 식이었는데, 이 책을 꽤나 감명 깊게 읽었기에 냉큼 추천해주었다. 읽고 난 후에 한동안 “강물이 너에게 무어라 말하였느냐” 라고 묻고 “옴” 이라고 답하는 놀이를 했다. 인도 여행 중, 보드가야나 바라나시에는 서로 소설에 묘사 된 풍경을 자주 이야기 했던 것 같다. 어찌됐건 지금은 헤어졌지만.

소설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 아주 유명한 소설조차도 읽어본 것이 많지 않은 나는 헤르만헤세의 작품도 싯다르타 하나만을 읽었다. 책을 빨리빨리 읽지 못하는 탓에 이 얇은 책도 읽는데 며칠이 걸렸다. 이번에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 다시 읽을 때도 다른 사람이라면 하루 이틀 걸려 읽을 것을 일주일 정도 읽은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얇지만 하나하나에 작가의 고뇌가 담겨있는 정성어린 문장으로 이루어 진 책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고뇌뿐만 아니라, 내가 평소에 생각해 왔던 것들이 단편적으로 나타나고, 그것에 의해 또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싯다르타는 사문들을 따라 수행을 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다른 생물의 껍데기 속으로 전이 시켜 스스로가 그 생물이 되고,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면서 그는 끊임없는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고뇌를 깨닫고 그 괴로움의 사슬을 끊고자 해탈을 원한다. 자신이 다른 생물이 되는 것. 나는 기억을 더듬어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 정도인 시절부터 남과 나의 경계에 대해 생각했다. 내 안에서 타인과의 경계라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지금은 조금 생각이 바뀌었지만 ‘나’라는 존재가 ‘너’가 될 수 있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생각 한 적이 있었다. 아니, 아주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해왔다. 모든 생물은 단 하나의 존재이고 그것을 담는 껍데기만이 서로 다른 것뿐이라고.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내가 저 나무일 수도 있고 저 새일 수 있다고. 싯다르타의 의도적이자 그럼으로써 깨닫는 윤회사상, 뫼비우스의 띠 마냥 끊임없는 고통을 끊고자 하는 고뇌에 찬 행위와는 다르지만 그 부분에서 어릴 적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회상했다.

소설에서 가장 감정이 몰입되고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간 부분은 싯다르타가 세속의 즐거움을 맛보고 인간사회에 물들어 자신의 타락을 느끼는 부분이었다. 전에도 이 소설을 읽으면서 똑같은 부분에서 똑같은 생각을 했었다. 자신과 다른 인간들과의 다른 점, 다른 인간들이 느끼는 어리석은 집착과 사랑을 느끼고 싶어 하는 싯다르타의 모습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일본문학인 ‘인간실격’을 떠올렸다. 인간실격의 주인공인 요조 또한 타인이 느끼는 사랑, 집착 등의 감정을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을 부러워하기도 한다. 나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정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이것 또한 그 느낌중 하나이지만. 추악함, 미움, 괴로움까지도 포함해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실로 위대하고 모든 사회의 근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추악함이 있기에 아름다움이 있을 수 있고, 미움이 있기에 애정이 있을 수 있고, 괴로움이 있기에 행복함이 있을 수 있다. 인간이 느끼는 나쁜 감정, 그 감정으로 인한 어리석은 행동들 까지도 나는 인간의 본성이며 사랑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기에 모든 행위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지만 결국 싯다르타도 후에 아들에 대한 집착과 사랑을 느끼며 행복해하지 않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이 사랑스러운 나로서는 소설의 이 대목에서 싯다르타에게 이 사랑스러움을 빨리 알아차리라고 마음속으로 외치곤 했다. 그가 보고 신기해하던 모습이 재물에 대한 아기 같은 소유욕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소설에서 반복되어 등장하는 ‘옴’ 은 그 뜻이 1000가지도 넘게 있다고 한다. 티벳 불교에서는 ‘옴마니밧메훔’ 을 외고 인도에서 요가를 배울 때도 명상시간엔 항상 긴 호흡과 함께 나지막이 ‘옴’ 을 노래했다. 싯다르타는 각성하고 인생의 변화기마다 진리의 말씀인 ‘옴’을 되뇌었다. 명상을 할 때마다 되뇌는 ‘옴’ 이라는 말은 진정효과가 있는지 이상하게 그 말을 소리 내어 말하면 나의 마음도 진정되며 평화를 찾곤 했다.

소설은 싯다르타의 일생을 통해 작가 자신의 고뇌와 깨달음을 묘사하고자 한 것 같다. 헤르만 헤세는 불교에 심취해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싯다르타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어쩐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그의 해탈에 대한 욕구와 갈등, 타인에 대한 사랑 등을 느꼈다. 물론 이것이 나의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지만.

과제 덕분에 몇 년 만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나름대로 익숙한 책임에도 독후감을 쓰기는 쉽지 않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한동안 이 책에 푹 잠겨서 버스로 이동할 때나 집에서 혼자 누워 뒹굴 거릴 때, 불현듯 떠올라 이런 저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때의 생각을 싸이월드 다이어리에라도 써두었으면 좋았을 것을, 항상 기록의 중요함은 머리로는 이해하면서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고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그동안 나의 가치관이 조금이나마 변한 탓인가 읽었던 책임에도 새로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인 상실의 시대에는 한 책을 하도 많이 읽어서 몇 페이지에 나오는 내용들을 다 외워버린 인물이 등장하는데 나는 이 책을 겨우 두 번 밖에 안 읽고는 온갖 생색은 다 낸 것 같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 책을 읽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도 이 누렇게 변색되고 헌 책 냄새가 풀풀 나는, 아버지의 손 글씨가 깨알같이 내 책상의 작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것만큼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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